GC04200244 |
尹容善 |
Yun Youngsun |
경규(景圭),자유재(紫楡齋),문충(文忠)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인물/문무 관인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
근대/개항기 |
신명호 |
[상세정보]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에 묘비가 있는 개항기 때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규(景圭), 호는 자유재(紫楡齋). 시호는 문충(文忠). 증조할아버지는 윤백동(尹百東)이고, 할아버지는 윤경렬(尹敬烈)이며, 아버지는 이조 참판 윤치희(尹致羲)이다. 어머니는 조진선(趙鎭宣)의 딸이고, 부인은 김연근(金淵根)의 딸이다. 손자는 윤덕영(尹德榮)과 윤택영(尹澤榮)이다. 증손녀[윤택영의 딸]는 순종의 두 번째 부인인 순정 황후 윤씨(純貞孝皇后尹氏)이다.
[활동 사항]
윤용선(尹容善)[1829~1904]은 1885년(고종 22)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 22위로 급제하였다. 1896년(고종 33) 아관파천으로 친러 내각이 수립된 후 탁지부 대신이 되었고, 4월 22일 내각 총리대신에 올랐다. 1897년(고종 34) 3월 새로운 법전 편찬을 위해 신설된 교전소(校典所)의 부총재 대원(副總裁大員)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대한 제국 출범과 함께 내각이 폐지되고 의정부 체제로 회귀하면서 의정부 서리 의정(署理議政)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교전소를 개편해 만든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의 총재직을 맡아 왕권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하였다.
1898년(고종 35) 9월 황제와 황태자에게 독이 든 커피를 진상한 독다 사건(毒茶事件)이 일어난 직후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맹공격을 받아 탄핵 대상으로 지목되고, 체직(遞職)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보수 내각이 재집권한 뒤 의정부 의정에 임명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작위를 받았다. 윤용선은 대한 제국이 선포된 후 주로 보수적 성향을 나타내던 정부의 요직에서 주요한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묘소]
윤용선의 묘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장산에 있다. 장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알려졌으며, 내부에 화기가 충만한 화산(火山)이고 산세 또한 매우 사나운 호상(虎像)이라 하여 무덤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순정 황후 윤씨의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윤용선과 그의 부인 김씨의 묘를 장산에 썼다. 장산의 장지봉 정상에 부인 김씨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윤용선의 묘가 있었으나 해방 후 윤용선의 집안이 몰락하여 돌보는 이가 없었다. 이에 오랫동안 장지 마을 주민들이 묘를 관리해 왔다. 1990년 군부대가 이전해 오면서 묘는 없어지고, 묘비만 군부대 테니스장 옆으로 옮겨졌다. 묘비에는 ‘정일품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의정대훈위증시문충해평윤공용선지묘(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議政大勳位贈諡文忠海平尹公容善之墓)’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