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진 병마첨절제사 장만상 장만상 1697 정축년 무과 경종3년(1723) 별시 병과 |
의주(義州) 무신(武臣) 최혁(崔爀)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백두산(白頭山) 한 줄기가 폐사군(廢四郡)606) 에서 검살봉(劒殺峰)을 거쳐 용만(龍灣)607) 까지 횡으로 길게 뻗었는데, 그 사이에 18개의 영(嶺)이 있고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만 나 있습니다. 적(賊)이 나아옴에 있어 이 길을 버리고서는 나올 길이 없습니다.
검살봉이 달려 적유(狄踰)의 서령(西嶺)이 되었고 그 영(嶺)의 북쪽은 곧 강계부(江界府)입니다. 부(府)의 동북쪽에 상토진(上土鎭)이 있고 상토진 북쪽에는 곧 폐사군의 자성(慈城)이 있습니다. 적이 자성을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자면 길이 상토령(上土嶺)을 넘어야 하는데, 상토진의 폐성(廢城)과 약졸(弱卒)로 어떻게 적(敵)을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적이 만일 상토령을 넘는다면 3백 90리(里)를 나와서야 길이 적유령(狄踰嶺)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부의 서쪽에 또 만포진(滿浦鎭)이 있는데, 진(鎭)의 북쪽은 곧 저들의 지역으로 굴혈(窟穴)인 건위(建衛)를 경유합니다. 적이 건위를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면 3백 90리를 나와서야 길이 적유령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신광진(神光鎭)은 영(嶺)과의 거리가 30리인데, 폐성과 약졸로 어떻게 적을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적유령에서 서쪽으로 달려 극성령(棘城嶺)이 되는데 영(嶺)의 북쪽이 곧 위원군(渭原郡)이고 군(郡)의 북쪽은 곧 저들 지역의 땅으로 산골짝이 험준한 곳입니다. 적이 그 동쪽을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면 4백 리를 지나와서 길이 적유령을 거치지 않으면 반드시 극성령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유원진(柔院鎭)은 극성령의 남쪽과의 거리가 7, 80리인데, 폐성과 약졸로 어떻게 적을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극성(棘城)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우현령(牛峴嶺)이 나오고 우현령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차유령(車踰嶺)이 나오고 차유령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아호미령(阿好味嶺)이 나오고 아호미령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월오내령(月吾乃嶺)이 나오고 월오내령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창성 거리령(昌城巨里嶺)이 나오는데, 이 다섯 영(嶺)의 북쪽이 곧 초산부(楚山府)입니다. 부(府)의 서쪽에 산양회진(山羊會鎭)이 있는데 이 진의 북쪽이 곧 저들 지역의 파저강(波豬江)입니다. 적이 파저강을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면 1백 7, 80리를 지나와서 길이 이 다섯 영(嶺)을 넘게 되며, 위원에서 나오는 경우에도 또한 이 다섯 영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우현진(牛峴鎭)은 우현(牛峴)과의 거리가 북쪽으로 10리쯤 되고 차령진(車嶺鎭)은 차령(車嶺)과의 거리가 북으로 5리쯤 되고 위곡진(委曲鎭)은 3령(嶺)과의 거리가 남쪽으로 5, 60리쯤 되는데, 폐성과 약졸로 어떻게 적을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창성 거리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보리견자령(步里見子嶺)이 나오고 보리견자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임토령(林土嶺)이 나오는데, 영(嶺)의 북쪽이 곧 벽동군(碧潼郡)입니다. 군(郡)의 동북(東北)에 광평진(廣平鎭)이 있는데, 진(鎭)의 북쪽이 곧 저들의 땅인 대청계(大淸溪)입니다. 군의 서쪽에는 벽단(碧團)·추구비(楸仇非) 두 진(鎭)이 있고 진의 북쪽은 곧 저들의 지역인 사창포(沙倉浦)·호연리(胡然里)입니다. 적이 대청계·사창포·호연리를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면 1백 70리를 나와서야 길이 두 영(嶺)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임토진은 영(嶺)과의 거리가 북쪽으로 7, 80리쯤 되는데, 폐성과 약졸로 어떻게 적을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임토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구개령(九堦嶺)이 나오고 구개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완항령(緩項嶺)이 나오고 완항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색장령(塞墻嶺)이 나오는데, 영(嶺)의 북쪽이 창성부(昌城府)입니다. 부(府)의 동쪽에 창주(昌洲)·대길호리(大吉號里) 두 진(鎭)이 있는데, 진의 북쪽이 곧 저들의 지역인 와별우 대와판(臥別隅大窩板)입니다. 적이 와별우 대와판을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면 90리나 혹은 70리쯤 나와서야 길이 3령(嶺)을 넘게 되는데, 또한 보리견자령이나 임토령 두 영을 넘을 수도 있습니다. 시채진(恃寨鎭)은 3령과의 거리가 남쪽으로 수십여 리인데, 폐성과 약졸로 어떻게 적을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색장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계반령(界畔嶺)이 나오고 계반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소억사령(巢億沙嶺)이 나오고 소억사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온정령(溫井嶺)이 나오는데, 영(嶺)의 북쪽이 곧 삭주부(朔州府)입니다. 부(府)의 북쪽에 구령진(仇寧鎭)이 있는데, 진(鎭)의 북쪽은 곧 저들의 지역인 관전(關田)입니다. 적이 관전을 따라 노태탄(駑駘灘)을 건너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면 70리를 나와서 길이 3령(嶺)을 넘게 됩니다. 천마진(天摩鎭)은 영(嶺)과의 거리가 북쪽으로 4, 50리쯤 되고 막령진(幕嶺鎭)은 영과의 거리가 남쪽으로 30리가 되는데, 폐성과 약졸로 어떻게 적군을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온정령(溫井嶺)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성현령(城峴嶺)이 나오고 성현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하고개령(下古介嶺)이 나오고 하고개령에서 서쪽으로 달려가면 가노령(加老嶺)이 나오는데, 영의 북쪽은 곧 우리의 의주부(義州府)입니다. 부(府)의 북쪽에 옥강진(玉江鎭)이 있고 진의 북쪽은 곧 저들의 지역인 신후수(申猴水)입니다. 적이 신후수를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면 4, 50리를 지나서야 길이 성현령(城峴嶺)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부(府)의 서쪽은 곧 저들의 지역인 구련성(九連城)입니다. 적이 구련성을 따라 나와서 압록강을 건너면 의주의 성졸(城卒)이 잘 방어할 수 있겠습니다만, 불행히도 함몰될 경우에는 30리를 지나서야 길이 하고개령·가노령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영(嶺)에 견줄 만한 폐성과 약진(弱鎭)도 없으니, 멀리 몰고 내려오는 강한 형세를 어떻게 저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18개의 영애(嶺阨)에 특별히 방어에 대비할 방책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혹은 구성(舊城)을 수리하기도 하고 혹은 신성(新城)을 축조하기도 하여 멀어도 수백 보(步)를 넘지 않고 가까워도 8, 90보(步)를 밑돌지 않게 한 다음, 성의 형세에 따라 문(門)을 만듭니다. 그런 다음 진관(鎭館)·진창(鎭倉)·군기(軍器)를 성문으로 옮긴다면, 수졸(戍卒)도 점점 많아지고 양향(糧餉)도 잇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개령·가노령에 이르러서는 비록 혹 성을 축조하기도 하고 진을 설치하기도 한다 해도 진에서 군식(軍食)을 제공함에 있어 응당 준비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압록강을 막 건너 만성(灣城)에 이르면 강줄기가 셋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있는 한 섬의 이름이 위화도(威化島)입니다. 이 섬은 땅이 비옥하고 둘레가 7, 80리가 되는데 섬 밖에 또 두 줄기 강물이 있습니다만, 이미 저쪽에서나 이쪽에서나 교통(交通)하는 길이 아니어서 사람이 살지 않고 폐기된 지가 수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만일 땅이 없는 백성들에게 원하는 대로 개간하여 경작하게 한다면, 3백여 일(日) 갈이의 전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둔전(屯田)으로 만들어 세금을 거두어 바치게 하면 곡식이 수만여 곡(斛)이 될 것이니, 앞에서 진달한 진(鎭)에서 제공하는 군식(軍食)도 이것을 쓰면 충분히 넉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영(嶺)의 형세가 이미 험하고도 높고 영의 길이 양장(羊腸)처럼 꼬불꼬불하니, 적이 오지 않으면 지키고 적이 오면 방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사람이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關門)을 지키면 1만 사람이 열 수 없다.’는 것으로 바로 이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해동(海東)의 중번(重藩)은 관서(關西)만 한 데가 없고 관서의 요해지는 이 18령(嶺)만한 것이 없으니, 이를 축조하는 방안은 진실로 좋은 것입니다. 저들의 형세가 너무 강하여 우리가 혹 패할 경우, 적이 영(嶺)을 넘으면 누가 감히 항거할 수 있겠습니까?
노령(老嶺) 이후는 1백여 리를 지나야 선천부(宣川府)인데, 부(府)에 방어사(防禦使)가 있고 또 좌현(左峴)의 별축(別築)이 있으니, 그래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고개(下古介) 이동과 계반(界畔) 이서는 6, 70리나 혹은 1백여 리를 지나야 귀성(龜城)이 나오는데, 부(府)에는 도호사(都護使)가 있어서 관방이 공고하니, 선천부의 방어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방어사의 직임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방어사를 따로 1과(窠)를 두는 것이 혹 관방(官方)에 구애되는 점이 있다면, 또한 어찌 행하기에 편의한 방도가 없겠습니까? 창성부(昌城府)는 곧 변새(邊塞)에 압림(壓臨)하고 있는 곳이어서 적병의 요충로(要衝路)에 해당이 되니, 방어사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방어사의 관직은 곤외(閫外)의 하나의 중임(重任)인 것이고 난을 당하여서는 원수(元帥)가 되니, 위치하고 있는 곳이 너무 드러나지 않아야 방어하는 데 있어 기권(奇權)을 부릴 수 있습니다. 대저 창성(昌城)과 같은 경우는 저들의 지역과 지극히 가까우니, 위치하고 있는 곳이 너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적봉(賊鋒)을 당하게 되면 방어하는 데 있어 기권을 부릴 수가 없게 되니, 어찌 귀성(龜城)이 요충로는 똑같으면서도 위치한 지역이 너무 드러나지 않고, 관방의 설치는 똑같으면서도 방어하는 데 있어 기권을 부릴 수 있는 것만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방어사의 직임은 저기는 버리고 여기를 취택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방어사를 저기에서 옮겨 여기에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그렇게 말하여 왔었다. 그러나 시행하기에 합당한지의 편부(便否)에 대해서는 갑자기 결단을 내릴 수 없다. 부연하여 진달한 여러 조항과 함께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으니, 그대는 물러가서 지획(指劃)을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75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8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註 606]
폐사군(廢四郡) : 여연(閭延)·우예(虞芮)·무창(茂昌)·자성(慈城)을 말함. 이 4군(四郡)은 세종 때 개척한 것이었으나, 단종 3년(1455)에 여연·우예·무창의 3군을 폐(廢)하였고, 세조 5년(1459)에 자성마저 폐하여, 이후 폐사군으로 불리웠음.
- [註 607]
용만(龍灣) : 의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