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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원군 이계전 처 대구군부인 진씨지묘

丫凹丰凸㐃 2018. 6. 17. 12:06






향토문화전자대전

풍기진씨

[]

분야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성씨/성씨
지역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출처디지털제주문화대전-풍기진씨

정의

진필명을 시조로 하고 진계백을 입도조로 하는 제주의 세거 성씨.

연원

풍기진씨의 시조 진필명()은 원래 당나라 태원() 사람으로 당 고종 때 병부시랑으로서 소정방과 함께 당군()을 이끌고 백제 정략에 참가했다가 백제를 멸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정착한 것으로 전한다. 우리나라의 진씨는 모두 진필명()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므로 우리나라 진씨의 도시조는 진필명()이다.

입향경위

진계백()은 입국 시조 진필명()의 18세손이며 중시조 진원()의 3세손이다.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으나 권신() 홍륜()·최만생()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화가 미칠 것을 미리 알고 1371년(공민왕 20)에 가족과 노비 등을 이끌고 제주목 애월리에 피난 입도하였다.

현황

귀성()인 진씨는 청주좌씨와 더불어 제주도에 많은 인구를 가진 귀화 씨족이다. 제주를 거점으로 그 혈통을 이어온 진씨는 관계()에 진출한 두드러진 흔적이 없어 타 가문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입도조 진계백()이 고려 말의 혼란기에 살면서 골육상잔과 모함으로 여념이 없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낙향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한다.

제주에 사는 진씨는 1950년 말까지 본관을 진주()로 통일하여 오다가 각 파간의 후손들이 본관의 근원을 확인하여 보자는 취지하에 조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주지방법원에 본관에 대한 호적 정정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며 1960년 5월 27일자로 적격 판결이 내려져 장파(: 판포)의 일부와 말파(: 납읍)인 진의한()의 후손들이 본관 진주()를 풍기()로 정정하기에 이르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런 관계로 옛 본관인 진주를 고수하고 있는 쪽은 중파(: 명월)인 진인한()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장파(: 판포)에 속하는 일부 후손들이 진씨가 우리나라에 귀화하기 전 중국에서의 근본이 대원()이었다는 역사적인 고증을 들어 본관을 대원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 제주지방법원에 본관에 대한 호적 정정 허가 신청을 내고 1968년 9월 26일자로 “풍기를 대원으로 변경함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결정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본관이 대원임을 주장하는 후손들은 『진주진씨족보』 서문의 말미에 “박종혁중형수진씨세계중왈시본옹천야 시조봉대원군휘정목시조 일백이십세 시봉 조선진주군운운(    )”이라는 구절과, 진필명()으로부터 15세가 되는 진질직()·진질황()·진질명() 등 형제 중 진질명()이 풍기부원군으로 봉하게 됨에 따라 그때부터 풍기를 본관으로 정하여 쓰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록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참고문헌

  • 탐라명감편찬위원회, 『탐라명감』(일붕삼장원, 1981)
  • 『제주선현지』(제주도, 1988)

    [네이버 지식백과] 풍기진씨 [豊基秦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진유경(秦有經)

[문과] 세종(世宗) 26년(144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6위(9/33)

[인물요약]

UCIG002+AKS-KHF_13C9C4C720ACBDU9999X0
숙형(叔衡)
본인본관풍기(豊基)
거주지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33명 [乙3‧丙7‧丁23]
전력생원(生員)
관직예조참의(禮曹參議)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진호(秦浩) 
[조부(祖父)]
성명 : 진소유(秦少儒)【補】(주1) 
[증조부(曾祖父)]
성명 : 진중길(秦中吉)【補】(주2) 
[외조부(外祖父)]
성명 : 서의(徐義)(주3) 
본관 : 대구(大丘)【補】 

[처부(妻父)]
성명 : 이백지(李伯持)[麗文](주4) 
본관 : 용인(龍仁)【補】 
[처부(妻父)2]
성명 : 김종남(金從南)(주5) 
본관 : 강릉(江陵)【補】 
[처부(妻父)3]
성명 : 유장수(庾長壽)(주6) 
본관 : 무송(茂松)【補】 
[안항(鴈行)]
 : 진유한(秦有韓)【補】(주7)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소장처]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奎 5202]‧[古 4650-97]);『국조방목(國朝榜目)』(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일사 351.306 B224]);『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국조방목(國朝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38]);『등과록(登科錄)』(일본 도요문고(東洋文庫, Toyo Bunko)[Ⅶ-2-35]);『해동용방(海東龍榜)』(국립중앙도서관[古6024-157]), 原: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아가와문고(阿川文庫[G23-176])
원본글 출처이파의 묘지명()
저자김종직()
이명 : 평중()
원전서지국조인물고 권43 연산시 이화인()

공의 휘()는 파()이고, 자()는 평중()이니, 한산() 사람으로서 가정() 문효공(, 이곡())의 4대손이다. 문효공과 그 아들 목은() 문정공(, 이색())이 서로 잇달아 원()나라 제과()에 합격하고 함께 규재() 구양공(, 원나라의 유학자 구양현())의 문인이 되어서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한산 이씨의 부자()가 있음을 알게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태산 북두()처럼 흠앙()하여 후세에 이의하는 말이 없는 것도 이 두분 때문이다. 문정공이 증() 영의정부사() 양경공() 이종선()을 낳고, 양경공은 영중추원사() 문열공() 이계전()을 낳았다. 문열공이 우리 세조 대왕의 지우()를 받아 공적이 환하게 나타나도록 기록되었으므로 축적된 은택이 더욱 커서 장구히 전해졌으니, 공은 그분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대구 군부인() 진씨()로, 지봉산군사() 진호()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나이 15세에 벌써 경사()를 섭렵()하여 대의()를 통달했고 또 글을 잘 지었다.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8세에 신미년(, 1451년 문종 원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으로서 집현전 박사(殿)에 선임()되고, 여러 번 응교()에 임명되었다. 얼마 아니되어 부지돈녕부사()에 시용()되었다가 지승문원사()에 오르고, 다시 사헌 집의()로 옮겼다. 과거에 오른 뒤 8년 사이에 품계를 뛰어 통정 대부()에 이르렀으니, 꽃다운 나이에 지위가 높았건만 사람들이 교만한 빛이 얼굴에 나타남을 보지 못하였다.

기묘년(, 1459년 세조 5년)에 문열공의 상()을 당했는데, 복상()을 마치고서 세자 보덕()에 임명되고, 여러 번 판내자시사()ㆍ판예빈시사()를 지냈다. 계미년(, 1463년 세조 9년)에 첨지중추부사()에서 승정원 우승지()에 발탁 임명되어 좌승지ㆍ도승지를 역임하면서 대저 3년 동안에 아침저녁으로 군덕()을 계도하여 나랏일에 비익()된 바 많았다. 세조가 일찍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홀로 공만을 불러 그 손을 끌어당겨서 용안()을 그 얼굴에다 비볐는데, 이때에 세자가 뫼시었으므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다른 날 네 신하다. 잊지 말도록 하라.” 하고 술을 따라 마실 것을 명하였다.

가선 대부() 한성 부윤()에 올랐다가 호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무자년(, 1468년 예종 즉위년) 9월에 예종이 즉위하자 경사()로 가서 승습()을 청했다. 갑오년(, 1474년 성종 5년)에 대구 군부인()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했다. 복상()을 마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참판으로 옮겨지니, 인재를 선발함이 각각 그 자격에 맞았다. 임금이 ‘평안도는 중국 사신이 지나는 곳이어서 반드시 풍채() 있고 응대()에 능한 자를 써야 한다’ 하고, 공을 자헌 대부()의 품계로 올려서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가 이듬해에 일이 있어 파직당하고, 돌아와서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ㆍ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또 경사()로 가서 하정()하였다.

경자년(, 1480년 성종 11년)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경연()에 입시()했다가 빈청()으로 물러와 밥을 먹었는데, 임금이 중관(, 내시())를 시켜 오서대() 한 벌을 내려 주고 말하기를, “경()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예조를 맡은 지 3년에 허물이 없었고, 공직()하는 여가()에는 경사()를 탐구하기를 잊지 않았다. 숭정 대부()로 품계를 뛰어올리자 대간()이 다투어 그 불가함을 논했는데, 임금이 그 소()에 비답하기를, “그 인물을 논할 뿐 자급을 논하지 않는 것은 내 평소의 뜻이다.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전고()에 밝은 것으로 알려졌고 더욱 의례()에 밝았으므로, 무릇 조정()의 큰 예절에 있어 비록 옛 제도가 있다지만 소략하여 의심나는 것은 반드시 고금()의 일을 상고하고 헤아려서 도리에 맞게 하기에 힘썼는데, 정희 왕후(, 세조비())의 상()에는 일이 급작스러움이 많았으나 공이 능히 그 변통을 잘 조절하였다.

영녕전(殿)에서 쓰는 악()이 종묘()에서 쓰는 악()과 달랐는데, 공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세조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건대, ≪시경()≫에 ‘아! 심원()한 청묘()에 주 문왕()을 제사지내는 시가()를 교사()에도 쓰고 묘사()에도 썼으니, 우리나라의 보태평()ㆍ정대업()의 악()은 종묘와 영녕전에 통용()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용비(, 용비어천가())의 시()는 태조 임금의 공업을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환왕(, 태조의 아버지 환조()) 이상 네 분 조종()의 덕업도 아울러서 실리고 있습니다. 영녕전에 쓰는 악은 세조 임금의 하교에 좇으심이 마땅합니다.” 했는데,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임인년(, 1482년 성종 13년) 동짓날에 공에게 명하여 황종관1)()을 만들고 재를 그 속에 채워서 기()의 변화를 살피게 하였는데, 기가 이르자 재가 과연 날았으니, 공의 식견의 해박함이 이와 같았다. 예조에 있은 지 무릇 6년째인 을사년(, 1485년 성종 16년) 3월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고, 얼마 안 되어 좌찬성()에 올랐다. 이듬해 2월 어느 날 병으로 졸()하였으니, 향년 53세이다. 부음()이 알려지니, 임금이 매우 애도하여 이틀 동안 철조()하고 의관()이 병을 아뢰지 않은 것을 죄주었으며, 조문()ㆍ치제()ㆍ부의()ㆍ증직()을 한결같이 전례대로 하였다.

공은 천자()가 호방 활달하고 총명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담론()을 잘하여서 평거()에 일찍이 글 읽지 않았지만 성리()의 근원과 역대의 흥망 치란()을 말하여 물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일찍이 선정전(殿)에서 임금이 재상들로 하여금 ≪대학()≫ㆍ≪중용()≫을 논하게 하였는데, 선성 부원군(노사신()공이 먼저 성()ㆍ도()ㆍ교() 3자()를, 그 다음에 이()ㆍ기()의 선후()를 발론하여 두 책의 표리()에 대해 이래저래 묻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공이 마치 소리의 울림처럼 응답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 판서()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의 씨족()과 세대()가 비록 한미한 가문이라도 그 갈래를 모두 분별했으며, 고려()의 여러 과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방목()에 누가 장원()하고 누구는 몇째로 합격한 것을 낱낱이 세어 한 사람도 어긋남이 없었다. 전후()로 자리가 옮겨져 임명될 때 모두 관각(, 홍문관ㆍ예문관 등 문필을 맡은 관청)의 직책을 띠었으며, 여러 차례 시관()이 되어 과거를 맡아보아서 인물을 얻음이 매우 많았다.

하동() 정인지()공이 늘 정승감으로 인정하고 공도 또한 스스로 기대했었는데, 겨우 고경(, 찬성())에 그치고 갑자기 성명()을 하직했으니, 슬프도다.

공은 영평위() 윤계동()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니, 태종 대왕()의 외손()이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일찍 죽고, 다음 이덕윤()은 상서원 부직장()이다. 딸이 둘인데, 막내는 일찍 죽고, 맏이는 부평 교수() 정수()에게 시집가서 한 아들을 두었다. 직장은 보성 군수() 이찬()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을 두었다. 이해 4월 모일()에 모원()에 장사지내려 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한산()의 이씨는 가정()이 터전을 닦았고, 목은()이 또 빛나게 확대시켜 번성했으므로, 구한2)()의 빛나는 이름 천하()에 알려졌네. 대대로 아름다운 공업을 계승했는데 공도 그 중의 뛰어난 분으로서, 소시()에 학덕을 쌓아 영화()가 빛을 발했도다. 여러 번 성명()을 만나서 벼슬길 활짝 열렸네. 예문관 응교()에 선발되었고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의 얼굴 앞에서 대하며 어찌 지척()에 있었던 것 뿐이겠는가? 편전(便殿)에서 경서()를 강론하자 임금께서 힘써 부지런히 하라 권장했으며, 인청당(, 어전(殿)을 뜻함) 안에서 진실로 들춰 드러냈도다. 오서대() 두르고 선 반열 찬란하게 빛났으니, 당당한 그 법도는 참으로 의정()에 합당하였는데, 하늘이 왜 그다지도 가혹하게 장수를 누리지 못하게 했는가? 무덤의 돌에 시()를 새겨 묘지()로 남기노라.

각주

  • 1) 황종관(黃鍾管) : 음률(音律)의 기초가 되는 12율(律)을 산정하는 데 사용된 척도관(尺度管). 아악(雅樂)에 있어, 음률의 기초가 되는 황종관을 먼저 만들고, 이것을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의하여 12율을 산출하였음.
  • 2) 구한(歐韓) : 한산 이씨(韓山李氏)인 가정(稼亭)과 목은(牧隱) 부자(父子)가 다 같이 당시의 원(元)나라 유학자 구양현(歐陽玄)의 문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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