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년(선조 32)∼1664년(현종 5).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면중(勉中)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고조는 참의(參議)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서고(徐固)이고, 증조부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서해(徐嶰)이며, 조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성(徐渻)이다. 부친 통헌대부(通憲大夫)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와 모친 선조의 딸 정신옹주(貞愼翁主)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서정리(徐正履)가 있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감찰(監察) 심열(沈說)의 딸 삼척심씨(三陟沈氏)이고, 둘째 부인은 판서(判書) 이시발(李時發)의 딸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으며, 음직으로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증광시 진사 3등 52위로 사마시에 합격한 후, 관직에 나아가 풍저창주부(豊儲倉主簿)‧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영춘현감(永春縣監)‧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청풍군수(淸風郡守)‧형조정랑(刑曹正郞)‧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충원현감(忠原縣監)‧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부평부사(富平府使)‧남원부사(南原府使)‧공조정랑(工曹正郞)‧풍덕부사(豊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충원현감으로 나아갔을 때 고을 풍속이 몹시 사나웠는데, 다스린 지 3년 만에 고을 풍속이 저절로 교화되어 조용해졌다.
슬하에 6남 7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병조참의(兵曹參議) 서문상(徐文尙)‧관찰사 서문중(徐文重)‧서문하(徐文夏)‧서문징(徐文徵)‧서문유(徐文裕) 등이다.
묘는 경기도 장단(長湍) 도라산(都羅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