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판서 증시 정의공[貞毅公] 검색에는 정헌공[貞憲公]으로 나온다.부여서씨 서 필원 묘
망주석이
저리 갈라진 것은 자연현상이라기보다
물론 자연 현상이지만
벼락에 의항 갈라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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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 계축옥사 일으킨 서양갑(徐羊甲)
한국성씨연구소 김진우2012.01.15 08:34:11
부여서씨(扶餘徐氏)
백제 태자 부여융의 후예
서익(徐益) 서자로 선조 때 계축옥사 일으킨 서양갑(徐羊甲)
왕에게 직언 잘해 당대의 오직(五直)으로 유명한 판서(判書) 서필원
정2품송을 뺨친다는 합천 화양리 소나무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835번지 나곡마을에 있는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89호)의 수령(樹齡)은 약 5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7.7m, 가슴높이 둘레가 6.15m, 뿌리 근처 둘레가 6.8m, 가지 밑의 높이가 3m이고, 수관폭은 동-서 25.2m, 남북 24.5m이다. 고지에서 자라는 고립목(孤立木)이며 마을앞에 있다.
조선때 연안김씨 김제남(金悌男)(1562-1613)은 그의 딸이 선조의 계비(繼妃)가 됨으로써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정1품)를 제수 받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13년(광해군 5)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이른바 계축옥사때 무고를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김제남(金悌男)이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하게 되자 그의 재종제(再從弟,6촌동생)되는 사람이 화(禍)를 피하여 이 소나무 밑에 초가(草家)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 나무는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하는데 수피(樹皮)가 거북이 등같이 갈라지고 수형(樹形)이 용같이 생겼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부여서씨(扶餘徐氏)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셋째아들 서융(徐隆)을 시조로 받든다.
서융은 원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씨(扶餘氏)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로 들어갔는데 당의 고종이 서씨성(徐氏姓)을 사성하고 "능진도총"에 임명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서수손(徐秀孫)으로 되어 있으나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부여융(扶餘隆)으로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의 태자이며 원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으나 서씨로 사성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부여서씨세보>에 의하면 660년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계백의 황산벌혈전을 마지막으로 패하고 의자왕은 태자 등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 소정방에게 압송되어 그곳에서 죽었으며 당제(唐帝)는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고려때는 문관의 종2품 품계)의 품계를 내리고 의자왕의 아들 융(隆)에게는 당고종이 서씨(徐氏)의 성을 하사하고 "능진도총"에 임명 하였으며서 융은 우리나라에 웅진도독(熊津都督,충남 공주 지방장관)이 되어 돌아왔다.
부여서씨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시조로 받들기 때문에 다른 서씨와는 뿌리를 달리한다. 부여서씨는 1500년의 뿌리깊은 역사를 자랑하나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를 실전(失傳:묘지나 고적 등이 대대로 전해 온 사실을 알수없게 됨)하여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국방장관)를 지내고 태원군에 봉해진 부여융의 후손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있으며 서수손(徐秀孫)은 그의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후 후손들이 원래 성씨(姓氏)인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부여서씨를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선조때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어진 신하.현명한 신하)으로 유명했던 서익(徐益)이 군수(郡守:종4품 수령)를 지내고 종부시 첨정(僉正:왕실의 보첩에 관한 일을 맡아본 종부시의 4품)을 역임했으며 이율곡을 구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이 화를 입었고 특히 시조(時調)에 능하여 명망이 높았다.
한편 서익의 아들 6형제 중 장남 서용갑(徐龍甲)이 선조때 현감(縣監:종6품수령)과 덕천 군수(郡守:종4품수령)을 지냈으며 광해군때 사색당파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넷째 아우인 서양갑(徐羊甲)과 함께 화를 입었고 뒤에 이조참판(參判:종2품차관)에 추증되었다.
부여서씨는 광해군 때의 [계축옥사]로 피해를 입은 가문이기도 하다. 만죽(萬竹) 서익(徐益)의 서자가 선조때 계축옥사를 일으킨 서양갑(徐羊甲)이다.
당시 서자는 벼슬에 기용되지 못함을 불평하던 서양갑은 같은 서자인 박응서. 심우영 등과 소양강 부근을 근거로 "강변 칠우"를 자처하며 시주(詩酒)를 즐기던 중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했다가 체포되어 목숨을 살려 준다는 이이첨 등 대북파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과 모의하여 영창대군의 옹립을 도모했다고 허위 자백함으로써 계축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 및 김제남 등이 참변을 당하고 자신도 처형되었다.
이 옥사로 그의 친족들이 죄없이 연루되어 많은 피해를 당했다.
정헌공(貞憲公) 서필원(徐必遠)은 서익의 증손으로 신독재 김집과 정홍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인조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4도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도지사)를 지내고 총융사(摠戎使:인조때 설치한 군영으로 수원등의 진(鎭)의 군무를 맡았다가 헌종때 총위영으로 고쳤던 일이 있음.총융사는 총융청의 으뜸 벼슬)를 역임했다.
그는 형조판서(刑曹判書:법률.소송.노예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본 6조의 하나로 정2품 장관)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국방장관)에 이르렀으며 왕에게 직언을 잘하여 이상진 등과 함께 당대의 오직(五直)으로 유명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서필원의 아들로 목사(牧使:정3품 수령)를 지낸 서경조(徐敬祖),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왕명으로 죄인을 추국하던 의금부의 5품)를 지낸 서정훈(徐正勳)이 유명하였고 사헌부 감찰(監察: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정6품)을 지낸 서계훈(徐啓勳) 돈령부도정(都正:돈령부(敦寧府)는 돈령의 친밀을 도모하기위해 설치된 관아.도정은 정3품)을 지낸 서운휘(徐雲輝)와 서석조(徐錫祚), 공조참판(工曹參判:종2품 차관)에 오른 서무덕(徐武德)등이 함께 가문을 빛냈다.부여서씨의 집성촌은 평남 개천군 일원이다.
조선 세조때 예산현감(종6품수령)으로 있던 서정수(徐貞壽)가 논산의 은진 지역으로 유배 왔다가 가야곡면 두월리 강청마을에 부친 서열(徐悅)의 묘를 안장하고 살았다. 그 후 자손들이 은진현에 세거하였는데, 은진의 토착 성씨였던 남양홍씨나 장수황씨, 진주강씨 등과 인척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1694년(숙종 20) 당시 논산시 가야곡면의 대표적 세거성씨인 부여서씨 인물 중 판관(判官,수령의 지휘받아 사법.행정을 담당한 종5품)을 지내고 통례원 벼슬을 지냈던 서열의 묘소 앞에 있던 비석이 오랜 시간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서열의 10세손 합천군수(종4품수령) 서경조가 후손들과 다시건립하고 찬(撰,지음)하고 서(書)하였다.
앞면에 ‘봉훈랑통례원봉례랑서열지묘(奉訓郞通禮院奉禮郞徐悅之墓)’라고 새겼으며 뒷면에는 서열의 가계, 행적 묘표를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새겼다. 음기에서는 처음 서열의 가계와 그가 지낸 관직, 부여서씨는 원래 백제시대부터 부여에 머물렀으나 세조 때 서열의 아들 서정수(徐貞壽)가 은진으로 유배를 오면서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입향 후 지역에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서익(徐益, 1542~1587)이다. 그는 송강 정철,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 저명한 기호 유현들과 깊은 교분이 있었다. 은진현에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 그루를 심고 만죽정(萬竹亭, 세심정이라고도 함)을 지어 스스로 호를 만죽헌이라 하였다. 현재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는 부여서씨가 약 30여호 있다.
부여서씨 유적으로는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서정수 묘표>가 있다. 두월리 호남고속도로 옆 동남향에 부여서씨 묘역이 있고, 묘역 안 서열 묘소에서 동쪽으로 서정수 묘소 앞에 묘표가 있다.
가야곡면에 처음 입향한 입향조 서정수(徐貞壽)의 묘 앞에 세운 묘표로서 1694년(숙종 20)에 후손인 서경조(徐敬祖)가 세웠다.
묘명(墓銘)은 조봉대부예산현감서정수지묘영인여주민씨부우(朝奉大夫禮山縣監徐貞壽之墓令人麗州閔氏?右)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정수가 논산에 묘를 쓴 이유와 자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서정수가 예산현감(종6품수령)으로 부임하였던 당시 왕의 행차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내렸음에도 몸이 좋지 않아 술에 의지하던 장인을 돕기 위해 술 한 그릇을 올렸다가 은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배를 당한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운 논산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자신도 묻히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또한 오랜 세월 비, 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들이 닳고 보이지 않아 후손들이 서열 묘표와 함께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또 가야곡면 삼전리에 서익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비문은 이재가 짓고 5대손 서정덕이 써서 1672년(헌종 13)에 건립하였다.
가야곡면 산노리에 서익을 비롯하여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등을 모셨던 효암서원이 있다. 1867년(고종 4)서익이 퇴위되어 6위만 모셨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폐철되었고, 192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서원 입구 오른쪽에 강응정 정려가 있다
효암서원은 임진왜란때소실된 가야곡면 두월리의 갈산사가 전신이며, 1713년(숙종 39) 현재의 자리인 산노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당시 갈산사는 중화재 강응정을 모신 서원이었으나 임진왜란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우암 송시열이 현 위치에 재건했다고 한다.
그후 서익,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김필태, 남준을 배향하였으나 위차(位次) 문제로 인해 서익은 1867년(고종 4) 행림서원을 건립하며 퇴위하였고, 나머지 6인을 모시게 되었다. 1867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5년 복원되었다.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있는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 만죽헌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익은 산노리의 갈산사에 배향되었다가 행림서원으로 분향되었다.
부여서씨는 조선시대에 1804년 서정훈이 문과(文科:대과) 춘당대시(春塘臺試:창경궁에 있는 대에서 과거를 보던 것)에 장원급제 한것을 포함,문과(文科:대과)에 4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5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2명 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가지)에 8명 등 3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조사에서 부여서씨는 1985년에는 총 3,032가구에 13,041명이었고 2000년에는 총 4,486가구 14,312명이었다.
부여(扶餘)는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의 옛 지명으로 소부리(所夫里:사비 泗?)라 불렀고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서기 660년(의자왕 20)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예속되어 672년(문무왕12)에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16)에는 부여군으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작은 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이후 부여현으로 조선 말까지 유지되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부여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홍산현(鴻山縣). 임천군 전역과 석성현(石城縣). 공주군 일부를 편입 16개면으로 부여군이 형성되었다. 1960년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비문 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연구위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교과서에 없는 한국인성씨의 역사, 도서출판 춘추필법펴냄),문중역사전문가들과 사단법인 <뿌리문화> 설립
부여서씨(扶餘徐氏)
백제 태자 부여융의 후예
서익(徐益) 서자로 선조 때 계축옥사 일으킨 서양갑(徐羊甲)
왕에게 직언 잘해 당대의 오직(五直)으로 유명한 판서(判書) 서필원
정2품송을 뺨친다는 합천 화양리 소나무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835번지 나곡마을에 있는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89호)의 수령(樹齡)은 약 5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7.7m, 가슴높이 둘레가 6.15m, 뿌리 근처 둘레가 6.8m, 가지 밑의 높이가 3m이고, 수관폭은 동-서 25.2m, 남북 24.5m이다. 고지에서 자라는 고립목(孤立木)이며 마을앞에 있다. |
부여서씨(扶餘徐氏)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셋째아들 서융(徐隆)을 시조로 받든다.
서융은 원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씨(扶餘氏)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로 들어갔는데 당의 고종이 서씨성(徐氏姓)을 사성하고 "능진도총"에 임명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서수손(徐秀孫)으로 되어 있으나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부여융(扶餘隆)으로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의 태자이며 원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으나 서씨로 사성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부여서씨세보>에 의하면 660년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계백의 황산벌혈전을 마지막으로 패하고 의자왕은 태자 등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 소정방에게 압송되어 그곳에서 죽었으며 당제(唐帝)는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고려때는 문관의 종2품 품계)의 품계를 내리고 의자왕의 아들 융(隆)에게는 당고종이 서씨(徐氏)의 성을 하사하고 "능진도총"에 임명 하였으며서 융은 우리나라에 웅진도독(熊津都督,충남 공주 지방장관)이 되어 돌아왔다.
부여서씨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시조로 받들기 때문에 다른 서씨와는 뿌리를 달리한다. 부여서씨는 1500년의 뿌리깊은 역사를 자랑하나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를 실전(失傳:묘지나 고적 등이 대대로 전해 온 사실을 알수없게 됨)하여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국방장관)를 지내고 태원군에 봉해진 부여융의 후손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있으며 서수손(徐秀孫)은 그의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후 후손들이 원래 성씨(姓氏)인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부여서씨를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선조때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어진 신하.현명한 신하)으로 유명했던 서익(徐益)이 군수(郡守:종4품 수령)를 지내고 종부시 첨정(僉正:왕실의 보첩에 관한 일을 맡아본 종부시의 4품)을 역임했으며 이율곡을 구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이 화를 입었고 특히 시조(時調)에 능하여 명망이 높았다.
한편 서익의 아들 6형제 중 장남 서용갑(徐龍甲)이 선조때 현감(縣監:종6품수령)과 덕천 군수(郡守:종4품수령)을 지냈으며 광해군때 사색당파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넷째 아우인 서양갑(徐羊甲)과 함께 화를 입었고 뒤에 이조참판(參判:종2품차관)에 추증되었다.
부여서씨는 광해군 때의 [계축옥사]로 피해를 입은 가문이기도 하다. 만죽(萬竹) 서익(徐益)의 서자가 선조때 계축옥사를 일으킨 서양갑(徐羊甲)이다.
당시 서자는 벼슬에 기용되지 못함을 불평하던 서양갑은 같은 서자인 박응서. 심우영 등과 소양강 부근을 근거로 "강변 칠우"를 자처하며 시주(詩酒)를 즐기던 중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했다가 체포되어 목숨을 살려 준다는 이이첨 등 대북파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과 모의하여 영창대군의 옹립을 도모했다고 허위 자백함으로써 계축옥사가 일어나 영창대군 및 김제남 등이 참변을 당하고 자신도 처형되었다.
이 옥사로 그의 친족들이 죄없이 연루되어 많은 피해를 당했다.
정헌공(貞憲公) 서필원(徐必遠)은 서익의 증손으로 신독재 김집과 정홍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인조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4도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도지사)를 지내고 총융사(摠戎使:인조때 설치한 군영으로 수원등의 진(鎭)의 군무를 맡았다가 헌종때 총위영으로 고쳤던 일이 있음.총융사는 총융청의 으뜸 벼슬)를 역임했다.
그는 형조판서(刑曹判書:법률.소송.노예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본 6조의 하나로 정2품 장관)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국방장관)에 이르렀으며 왕에게 직언을 잘하여 이상진 등과 함께 당대의 오직(五直)으로 유명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서필원의 아들로 목사(牧使:정3품 수령)를 지낸 서경조(徐敬祖),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왕명으로 죄인을 추국하던 의금부의 5품)를 지낸 서정훈(徐正勳)이 유명하였고 사헌부 감찰(監察: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정6품)을 지낸 서계훈(徐啓勳) 돈령부도정(都正:돈령부(敦寧府)는 돈령의 친밀을 도모하기위해 설치된 관아.도정은 정3품)을 지낸 서운휘(徐雲輝)와 서석조(徐錫祚), 공조참판(工曹參判:종2품 차관)에 오른 서무덕(徐武德)등이 함께 가문을 빛냈다.부여서씨의 집성촌은 평남 개천군 일원이다.
조선 세조때 예산현감(종6품수령)으로 있던 서정수(徐貞壽)가 논산의 은진 지역으로 유배 왔다가 가야곡면 두월리 강청마을에 부친 서열(徐悅)의 묘를 안장하고 살았다. 그 후 자손들이 은진현에 세거하였는데, 은진의 토착 성씨였던 남양홍씨나 장수황씨, 진주강씨 등과 인척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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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숙종 20) 당시 논산시 가야곡면의 대표적 세거성씨인 부여서씨 인물 중 판관(判官,수령의 지휘받아 사법.행정을 담당한 종5품)을 지내고 통례원 벼슬을 지냈던 서열의 묘소 앞에 있던 비석이 오랜 시간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서열의 10세손 합천군수(종4품수령) 서경조가 후손들과 다시건립하고 찬(撰,지음)하고 서(書)하였다.
앞면에 ‘봉훈랑통례원봉례랑서열지묘(奉訓郞通禮院奉禮郞徐悅之墓)’라고 새겼으며 뒷면에는 서열의 가계, 행적 묘표를 세우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을 새겼다. 음기에서는 처음 서열의 가계와 그가 지낸 관직, 부여서씨는 원래 백제시대부터 부여에 머물렀으나 세조 때 서열의 아들 서정수(徐貞壽)가 은진으로 유배를 오면서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입향 후 지역에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서익(徐益, 1542~1587)이다. 그는 송강 정철,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 저명한 기호 유현들과 깊은 교분이 있었다. 은진현에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 그루를 심고 만죽정(萬竹亭, 세심정이라고도 함)을 지어 스스로 호를 만죽헌이라 하였다. 현재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는 부여서씨가 약 30여호 있다.
부여서씨 유적으로는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서정수 묘표>가 있다. 두월리 호남고속도로 옆 동남향에 부여서씨 묘역이 있고, 묘역 안 서열 묘소에서 동쪽으로 서정수 묘소 앞에 묘표가 있다.
가야곡면에 처음 입향한 입향조 서정수(徐貞壽)의 묘 앞에 세운 묘표로서 1694년(숙종 20)에 후손인 서경조(徐敬祖)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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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명(墓銘)은 조봉대부예산현감서정수지묘영인여주민씨부우(朝奉大夫禮山縣監徐貞壽之墓令人麗州閔氏?右)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정수가 논산에 묘를 쓴 이유와 자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서정수가 예산현감(종6품수령)으로 부임하였던 당시 왕의 행차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내렸음에도 몸이 좋지 않아 술에 의지하던 장인을 돕기 위해 술 한 그릇을 올렸다가 은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배를 당한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운 논산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자신도 묻히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또한 오랜 세월 비, 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들이 닳고 보이지 않아 후손들이 서열 묘표와 함께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또 가야곡면 삼전리에 서익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비문은 이재가 짓고 5대손 서정덕이 써서 1672년(헌종 13)에 건립하였다.
가야곡면 산노리에 서익을 비롯하여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등을 모셨던 효암서원이 있다. 1867년(고종 4)서익이 퇴위되어 6위만 모셨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폐철되었고, 192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서원 입구 오른쪽에 강응정 정려가 있다
효암서원은 임진왜란때소실된 가야곡면 두월리의 갈산사가 전신이며, 1713년(숙종 39) 현재의 자리인 산노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당시 갈산사는 중화재 강응정을 모신 서원이었으나 임진왜란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우암 송시열이 현 위치에 재건했다고 한다.
그후 서익,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김필태, 남준을 배향하였으나 위차(位次) 문제로 인해 서익은 1867년(고종 4) 행림서원을 건립하며 퇴위하였고, 나머지 6인을 모시게 되었다. 1867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5년 복원되었다.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있는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 만죽헌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익은 산노리의 갈산사에 배향되었다가 행림서원으로 분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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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서씨는 조선시대에 1804년 서정훈이 문과(文科:대과) 춘당대시(春塘臺試:창경궁에 있는 대에서 과거를 보던 것)에 장원급제 한것을 포함,문과(文科:대과)에 4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5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2명 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가지)에 8명 등 3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조사에서 부여서씨는 1985년에는 총 3,032가구에 13,041명이었고 2000년에는 총 4,486가구 14,312명이었다.
부여(扶餘)는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의 옛 지명으로 소부리(所夫里:사비 泗?)라 불렀고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서기 660년(의자왕 20)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예속되어 672년(문무왕12)에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16)에는 부여군으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작은 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이후 부여현으로 조선 말까지 유지되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부여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홍산현(鴻山縣). 임천군 전역과 석성현(石城縣). 공주군 일부를 편입 16개면으로 부여군이 형성되었다. 1960년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김진우 |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비문 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연구위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교과서에 없는 한국인성씨의 역사, 도서출판 춘추필법펴냄),문중역사전문가들과 사단법인 <뿌리문화>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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