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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행서 묘

丫凹丰凸㐃 2015. 8. 4. 10:21

 

 

 

 

 

 

 

 

 

아래글 가져온데 ↙↙
http://afterheard.tistory.com/92

 

“姓을 갈지않은 한국사람 여기 누워있다”

무명인郭行瑞;춘원과 교류, 白凡과도 독립운동 발자취

  “姓을 갈지 않은 사람, 한국사람 곽행서 여기 누워있다-” 산이 물들기 시작한 어느 가을 날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로 등산 갔다가 산 자락에 있는 묘에 이렇게 새겨진 비석을 보게 됐다. 묘비 문귀에 마음이 끌려 묘지 관리인을 통해 비석을 세운 사람(아들)을 찾았다. 고인의 생전 행적을 추적할 수 있었다. 



                                         곽행서 생전 모습 

 

 

                                           곽행서묘 비석

      그는 한 시대 언론인이자 일제강점기에 철저히 항거했던 숨은 독립운동가였다. 
    
郭行瑞곽행서 (1907년 4월 14일∼1995년 2월 5일)-. 그의 생전 업적을 공적 문헌에 기록된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 본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수월하고 남보다 편안하게 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는 그렇다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도 아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보다 편하고 윤택하게 살 수도 있었던 유복한 가정환경에서도 굳이 그 많은 재산을 공익사업(독립운동 등 문화사업)에 내받치고 (일제 압제에 항거)스스로 고난의 짐을 지고 살았던 인물이다.    

        한글전용 고집, 新世紀 잡지 발행    
원적;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선대리
본적;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 163  
1928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제6회 졸업
1934년 동경 일본대학 사회학과 졸업

 

  그는 1939년 경성 종로2가 91 조선 예수교 서회빌딩에서 월간잡지 ‘新世紀’를 창간, 발행․편집인․주간을 맡는다. 신세기誌는 1939년에 시작,1941년까지 3년 간 총 27권을 발행하고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다.
     
정기 간행물인 월간 대중잡지 ‘신세기’를 일제기간 마지막까지 국문(한글)으로 발행을 한사코 굽히지 않았다.(조선일보 동아일보 보다도 6개월 늦게 폐간까지 버티다) 끝내 조선총독부가 법령으로 실시한 창씨개명까지 거부하다가 일제가 물자배급(잡지용지) 까지 중단함으로써 폐간되기까지 간행물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한 시대 지식인.
     
일본경찰에 의해 독립운동 행적으로 조사를 받았던 일경문서에 나타난 행적을 중심으로 살펴 본다. 1928년 2월 13일 학생맹휴에 관한 강연회 간여로 내사를 받는 것으로 그의 독립운동의 생애가 펼쳐진다.(京鍾警高秘 제9999호에 기제)
    
1929년 6월 일본 동경에서 일본대동창회 學海학해확대 결의대회에 참석하는 등 반일운동으로 쫓기는 몸으로 1934년 2월 일본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한다. 그 후에도 1939년 7월 內地내지유학생 동정-불온사상 심취로 내사를 받아 계속 요시찰 인물로 일경의 미행을 당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일본 경찰이 뒤쫓아 다니다 보니 그에게는 도리어 ‘곽 형사’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그는 신세기 폐간되기 앞서 1940년 4월 친일파 박흥식 재혼 호화피로연의 참관기를 여과 없이 자기 잡지인 신세기에 세세히 보도하였다가 일경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옥고를 겪이도 했다. 이후 일본식 창시개명 거부  및 불응운동으로 일경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 후에도 1945년 9월 해방 즉시 국민대회준비회 발기인으로 참여, 在重慶재중경 임정 지지선언과 함께 대한독립촉성회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했다.

  白凡 김구와 의기투합 독립운동 가담 

 이 앞서 일제 때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간다. 백범과의 인연은 백범의 어머니 郭樂園곽락원이라는 씨족관계와 동향인이라는 관계로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1948년 1월 2일 경교장으로 김구 주석에게 세배를 드렸다. 이때 ‘白凡逸志백범일지’(문화재) 를 백범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이 백범일지에는 백범이 직접 만년필로 곽행서에게 君이 아닌 ‘同志동지’ 라고 (쓰고)부르면서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한다. 이 백범일지는 그의 아들 郭昌宣곽창선 대양파이프 회장이 先考선고의 유지에 따라 家寶가보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부전자전이라고나 할까. 아들은 사업가 이면서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새마을 중앙후원회 운영위원, 광복회 강남지부 고문 등 공익과 사업에 투신하고 있다. 아들의 창선이라는 창성할 창(昌),베풀 선(宣)이라는 이름도 창성하고 베풀라는 뜻으로 춘원 이광수가 친히 지어주었다.   
    
1950년 6․25동란으로 부산으로 피난 갈 때 백범의 백범일지를 나무궤짝에 넣어 경복궁 관사 50호 땅속에 묻고 갔다. 피난갔다가 돌아와 땅을 파 백범일지는 찾아냈으나 습기로 일부 얼룩저 그늘에 고이 말려 지금껏 아들이 정중히 보존하고 있다.(문화재로 국가에 헌납할 절차를 밟고 있다.)
    
곽행서의 주요약력은 1949년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공보비서관, 1952년 부산피난시 조선방직 후생부장, 1954년 서울, 경기, 경남, 충북, 전남 상이군인 정양원 원장, 1958년 한국 자연보전협회 창립회원,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회원, 1990년 8월 시집 ‘동방의 등불’을 펴 냈다. 
    
곽행서의 일생은 일제 압제하 말 못할 고초로 점철되어있다.1940년 6월 보안법위반으로 경찰에 검거, 송치돼 벌금형 30원과 동년 8월 또 100원을 선고 받는다.1940년 4월 친일파 박흥식 결혼식 참관기 게제 서대문 형무소 복역하는 등 청년기 내내 일경에 쫓기는 몸으로 살았다. 
    
그는 백범과의 만날 때 그 경로를 이렇게 몸소 기록해 두었다. “1948년 나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새루 부락)에 살고 있었다. 그해 1월 1일 오후 나는 중앙선 덕소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삼청동 妹家매가에서 자고, 1월 2일 오전 경교장으로 갔다. 김구 주석에게 세배를 드렸다. 경교장 아래층 응접실에는 10여명의 사람이 있었다. 비서 鮮于 鎭선우 진씨의 안내로 2층 주석실에 들어가 세배를 드렸다. 주석님께서는 그 직전 연말에 발간한 ‘白凡逸志백범일지’를 꺼내시어 책 뚜껑을 제치시고 애용하시는 만년필로 책 첫 장에 나의 성명을 쓰시고 君이라고 쓰시지 않고, ‘同志동지’라고 쓰시는 것을 옆에서 보고 나는 놀랐다. 주석님은 자신의 존함을 쓰시고 도장까지 찍어 주셨다. 그 이듬해인 1949년 6월 26일 주석께서는 민족반역자의 하수인의 총탄에 쓰러지셨다.”  이런 글을 자신이 쓰고 자기 이름(곽행서)옆에 자기 도장을 찍어 남겨 두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렬한 우리말(한글)애용자였다. 철기 이범석 국무총리 공보비서관 시절, 총리가 정부 현판을 한문으로 쓰도록 지시했는데도 굳이 이를 거역하고 한글을 쓰기를 고집하다가 호된 꾸지람을 들은 일을 후일담으로 남겼다.

  30년 전 鄕誌에 ‘자유민주주의’ 문구 사용   1935년 일제가 한글사용과 문자보급운동 중지 이후 신세기는 1941년 6월 폐간될 때까지 조선 동아일보보다 6개월 더 한글전용 정기 간행물로 일제 말기까지 발행한 한글 정기간행물의 사수자였다. 딸 ‘곽소담’(곽행서의 4녀)이란 이름도 해방 후 한글 이름을 고집, 호적에 최초로 등재했던 것인데, 한국일보의 ‘고운 한글이름’에 당선되기도 했다. 심지어 그의 묘소에 있는 비석에 ‘성을 갈지 않은 사람…’이라는 글귀도 생전에 자필로 써서 두었다가 자식에게 주어 탁본해 비석에 쓰게 했다.   
    
친일파 1호로 민족반역자 박흥식을 반민특위에 제소한 사람도 그였다. 철저한 애국자이자 선각자였다. 30년 전인 1982년 고향인 황해도 鄕友誌향우지에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자유민주주의’란 용어를 사용해 일찍이 대한민국의 정체성 문제를 부르짖었던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일제말기인 1942년(소화 17년) 조선식산은행에서 자신의 재산을 담보로 4천726원을 대출 받아 독립자금으로 희사한 문서도 남겼다. 현재 한국은행에서 환산해보니 6억6백만원이라는 거금이다.
    
사업가인 아들 창선씨는 “우리가 자랄 때는 아버지에게 재력이 있었는지 전연 몰랐다. 학생 시절 남들이 다 가는 수학여행도 한번 보내 주지 않을 정도로 집안 일에는 엄격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말년까지 문필가로의 필봉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84세의 노령이던 1990년 ‘동방의 등불’이란 시집을 펴냈다. 그는 이 시집을 내면서 책머리에 이런 말을 썼다. “나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시를 썼다. 그러니까 60년은 더 되었다. 차곡차곡 공책에 써서 두었더라면 그 동안 몇 권의 시집이라도 출판하였겠지만, 詩想시상 이 떠오르면 아무렇게나 아무 종이에나 쓰곤 했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뒤적거려 보았자 다 찾을 길이 없으므로 대충 추려서 출판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시로 쓴 자서전이라고 할까.
    
이 책의 이름은 詩聖시성 타고르(Tagore,Rabin-dranath; 1861~1941)가 일찍이 한국을 ‘동방의 램프(등불)’라고 노래 하였기에, 후학인 내가 감히 한국이라는 뜻으로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다. 서정시나 서사시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나 청나라의 시인은 말 밖의 말이요, 이치 밖의 이치(言外之言 理外之理)라고 하였다”고 썼다.

        말년에 ‘동방의 등불’집필 정열 멈추지 않아
   
시집 앞부분에 이런 시가 눈길을 끈다. 남자; “무쇠 망치로 때려도 영 부서지지 않고 꼼작도 하지 않고 떡 벌어진 어깨며 쩍 뻗은 두 팔 두툼하고 넓직한 그의 잔등이여! 검붉은 빛일레라 그 거센 녀석.” 
    
여자; “너는 가볍고 무겁지 않다 물결 아닌데 가슴에 파도 치더라 개미허리인양 가는데 끊어지지 않더라 하늘한 나래며 조잘구례한 소리여! 사람들이 이르기를 꽃은 꽃인데, 너는 웃으며 말한다 하더라”고. 인쇄체가 아닌 자신의 필체로 써 놓았다. 그의 필치는 간단 명료 하지만 힘이 뻗혀있고 기계가 살아 번뜩인다. 당대 문학의 거장인 춘원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춘원이 곽행서의 문기를 인정한 대목이라 볼 수 있다. 
    
백범이 백범일지에 친필로 ‘동지’라는 글귀를 친히 써 준 것도 그의 독립자금의 고마움과 그의 독립운동가로의 평가를 내린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가려져있던 그의 새애가 드러난 것은 그의 유품정리과정에서 관계문건과 일기형식으로 된 메모가 발견되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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