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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정씨

丫凹丰凸㐃 2014. 12. 24. 19:12

 

 

 

 

 

 

 

 

 

 

▼ 아래는  퍼온 글

1.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31-1번지의 묘소

  4세 할아버지부터 14세 할아버지까지를 모신 묘역이나, 원래는 14세 발(發)자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 곳이다. 4-13세 할아버지의 묘는 실전되어 제단비만 있다. 1966년에 먼저 12세 호희공 요(曜)자 할아버지와 13세 갱(賡)자 할아버지의 제단을 윗편에 각각 세웠으며, 그 후 1993년 맨 위쪽에 4세부터 11세까지의 <초계정씨8위제단>을 건립해놓았다. 그밖에 직계는 아니지만 묘역에는 유명한 학자이셨던 20세 수몽공(曄字) 할아버지의 묘가 있다.

○4세 행부(幸夫) : 원외랑 복공(福公) 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부천호장(副千戶長)을 지냈다. 배(配)는 부인(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 공의 후손을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라 일컬으며, 후손들은 경기도 이천, 남양, 강원도 춘천, 전라남북도, 황해도 등 각지에 살고 있다.

○5세 순진(順珍) : 행부 공의 독자(獨子). 근시낭장(近侍郎將)을 지낸 것만 전함.

○6세 복승(復升) : 순진 공의 독자. 천호장(千戶長)을 지냈음. 배(配)는 부인(夫人) 정(鄭)씨.

○7세 공직(公直) : 복승 공의 독자. 부만호(副萬戶)를 지냈음. 배(配)는 부인(夫人) 진주강(姜)씨.

○8세 륜(倫) : 공직 공의 독자.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음. 배(配)는 부인(夫人) 진주강(姜)씨.

○9세 서유(瑞儒) : 륜 공의 독자. 태학생(太學生)이었음. 배(配)는 부인(夫人) 창주신(申)씨.

○10세 수지(守之) : 서유 공의 독자. 군기감(軍器監) 검교(檢校)를 지냈음. 배(配)는 부인(夫人) 영광조씨(靈光曺氏).

○11세 화(和) : 수지 공의 독자. 좌우위(左右衛) 정용낭장(精勇郎將)을 지냈는데, 한편으로는 중낭장(中郎將)이라고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보승별장(保勝別將)이라고도 일컬었음. 배(配)는 부인(夫人) 개성왕씨.

○12세 요(曜) : 화 공의 네 아들 중 장자. 시호(諡號)는 호희(胡僖).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여 창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 화녕부사(和寧府使)로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1388년(우왕 14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조선조에 들어와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의흥삼군부 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 同知節制使)에 이르고 익대개국훈(翊戴開國勳)에 녹훈되었다.

    숭정대부 판한성부사(崇政大夫 判漢城府事)에 이르렀다. 시법(諡法)에 “彌年壽考曰胡, 小心畏忌曰僖”라 하였다. 행적이 <조선왕조실록> 태조조에 보인다.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백천조씨(白川趙氏). 공의 후손을 ‘호희공파’라 하며 이천, 춘천, 파주, 수원 등지에 살고 있다.

○13세 갱(賡) : 호희공의 2남 중 장자.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내고 숭정대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

○14세 발(發, 1390-1475) : 갱 공의 독자. 조실부모하여 조부에 의해 컸으며 음보(蔭補)로 8세 때 산원(散員), 13세 때 전농직장(典農直長)이 되었으며, 그 후에도 내직과 외직을 고루 지낸 다음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가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資憲大夫 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이르러 치사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468년(세조 13년)에 숭정대부지중추부사(崇政大夫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였고, 향수 86세.

○20세 엽(曄, 1563-1625) : 16세 전 공의 현손으로 유성(惟誠) 공의 독자.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설촌(雪村). 시호는 문숙(文肅).

    어려서부터 자질이 영수(英秀)하여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우계 성혼(牛溪 成渾),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문인이었다.

    1583년(선조 1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 숭문원, 형조좌랑, 홍문관수찬, 장령을 거쳐 서천군수, 예조정랑 고급사(告急使), 사성, 수원부사를 지내고 응교, 필선, 승지, 제조참의, 나주목사, 대사간을 지냈다.

    당시 우계선생의 문인들이 배척을 당하게 되어 함경도 종성부사로 좌천되었었고, 기자헌의 참소로 (종성에서 오랑캐의 수만 명 포위를 잘 수비했으나 수비 잘못으로 포로가 생기게 했다는 내용)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1605년 소환되어 성주, 홍주 군수를 지냈다.

    광해조 때 다시 예조참판, 대사성, 승지, 판결사, 대사간을 거쳐 충청감사, 도승지,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박응서의 상변사건으로 벼슬자리를 스스로 물러났다.

    1614년 공조참판 자헌대부 판중추에 이르렀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므로 양양부사로 자원하여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3년 서인들의 인조반정 후 대사성으로 다시 나아가 동지경연, 원자 사부에 이르렀다.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공주로 남행할 것을 주장하였고, 난리가 평정된 후 대사헌에 이르고 좌참찬, 좌부빈객에 승임되었다. 왕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장차 더욱 중용되어 국가의 대사를 경륜할 수 있을 만한 지위에 이르렀으나 격무로 1625년 돌아갔으니 향년 63세였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

    의정부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숙이다. 시법에 이르기를 “道德博問曰文, 剛德克就曰肅”이라 하였다. 종성서원과 광주(廣州) 구암서원(龜岩書院),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역에는 당시의 문장가였던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명필이었던 신익성(申翌聖)이 쓴 수려한 자태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조부터 인조조까지에 공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으며, 문집인 <수몽선생집(守夢先生集)> 8권 2책과 <근사록석의(近思錄釋義)> 14권 4책, <주역석의(周易釋義)> 등의 저술이 전해오고 있다. 문집은 제자인 나만갑(羅萬甲. <병자록>의 저자)이 모아 편차한 것을 그의 아들 나성두(羅星斗)가 1661년 해주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고, 후대에 송시열(宋時烈)의 서문이 붙여졌으며 지금은 ‘한국문집총간’의 66번째 책으로 나와 있다. <근사록석의>도 송시열의 서문이 붙여져 간행되었고, 조선시대 성리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저술이었다. 문집 중의 <금강록(金剛錄)>은 양양부사 재직시 제자 등과 금강산을 유람한 기록으로 얼마 전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2.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산 188번지의 묘소

  15세부터 18세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다. 다만 18세 거(琚)자 할아버지의 묘는 단비만 있다(1990년에 건립).

○15세 윤신(允愼) : 발 공의 6남 3녀 중 장자. 통정대부 파주목사를 지냈으며, 세조 때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용인이씨(龍仁李氏)와 숙부인 유원변씨(柔遠邊氏).

○16세 전(詮, 1443-1516) : 윤신 공의 4남 3녀 중 3남. 자(字)는 언평(彦平). 1482년(성종 1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7개 군의 수령을 지내다가 끝에는 통정대부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에 이르렀으며, 어왜공신(禦倭功臣)에 녹훈되었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향수 74세.

○17세 숭년(崇年, 1477-1513) : 전 공의 2남 중 장자. 자는 자명(子明). 1495년(연산군 원년)에 순릉참봉(順陵參奉)을 거쳐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가 걸양(乞養)하여 맹산현감(孟山縣監)을 지냈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향년 37세.

○18세 거(琚) : 숭년 공의 6남 중 3남. 자는 공절(公節). 1531(중종 26년)에 천거되어 제릉참봉(齊陵參奉) 겸 가주서(仮注書)를 지냈음. 인종의 합장 문제로 대사헌 안현, 대사간 이익, 부제학 주세붕(周世鵬) 등과 간언을 올리기도 하였음. 배(配)는 공인(恭人) 창원황씨(昌原黃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