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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헌공 이지당 윤헌주

丫凹丰凸㐃 2014. 12. 20. 09:4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길보(吉甫), 호는 이지당(二知堂).

 

종복(宗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열(受說)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택(澤)이며, 어머니는 안영달(安穎達)의 딸이다.

1683년(숙종 9)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가 참봉·봉사를 역임한 뒤 1698년 춘당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곧 전적·황해도도사를 거쳐 이듬 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헌납·지평·장령 등 언관을 역임하면서 궁장토(宮庄土)의 폐단을 지적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등의 언론 활동을 폈다.

그 뒤 시강원에 들어가 제자를 가르쳤고, 장악원·군자감의 정을 거쳐, 외직에 나가 남양·양주 군수를 역임하였다. 1705년 사간에 올랐으며,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여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모함을 받아 국문을 받았지만 결백이 밝혀져 석방되어 다시 승지가 되었다.

1716년 성주목사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하여 품계가 올랐고, 돌아와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이어 충청감사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친 뒤 돌아와 한성부의 우윤(右尹), 형조·병조·호조의 참판을 지냈고, 도승지를 여러 차례 역임한 뒤 1720년(경종 즉위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북도(北道)의 풍속이 비루함을 보고 관혼상제의 예절을 보급하고, 사서삼경을 간행해 열읍(列邑)에 배포하는 등 북도 교화에 노력하였다. 또 진(鎭)과 보(堡)를 증설하고 군사들의 훈련을 독려해 국방을 강화하는 등의 치적을 올렸다.

그 뒤 한성판윤으로 돌아왔으나 성주목사와 함경감사로 있을 때 청렴하지 못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용천부(龍川府)에 정배되었다. 그 뒤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득세할 때에 석방되어 평안감사를 역임하였다.

다시 여러 판서를 거친 다음 파직당했다가 이인좌(李麟佐)·박필현(朴弼顯) 등이 무신란(戊申亂)을 일으키자 북도안무사(北道安撫使)로 기용되어 평안도 일대에서 민심을 무마하고 돌아와 곧 죽었다. 1748년(영조 24) 무신란을 토평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